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 해 해전 (문단 편집) === 일본 해군의 계획 === 일본 해군에서도 몇 안되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오자와 제독은 일본 함재기의 유일한 장점인 항속 거리(100Km 이상 우위에 있었다)를 이용해 미 함재기의 항속 거리 밖에서 치고 빠지는 아웃레인지 공격을 구상했다. 더불어 신중한 스프루언스 제독이 상륙함대의 보호를 위해 상륙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심중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러나 미군의 전력 규모에 대해서는 자신들처럼 항모 3척이 1개 전단을 이룬다고 생각하여 15척이 아닌 12척으로 실제보다 낮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미군 지휘관이 스프루언스 대장이었기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처럼 복수의 기동함대로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미드웨이 해전 당시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선임자인 [[프랭크 플레처#s-2|프랭크 '블랙잭' 플레처]] 제독이 지휘했고 [[미드웨이 해전#s-5.2|플레처 제독이 개전하기 직전에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따로 행동하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따로 움직인 것이다]]. 즉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함대의 각개 행동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단독 판단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스프루언스 대장 또한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 함대가 분산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경항모 [[치토세]], [[치요다]],[* 치토세와 치요다는 본래 [[수상기 모함]]으로 건조됐으나 43년 말 항모부족으로 인해 경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즈이호]] 3척을 중심으로 그 호위로 이제까지 호텔 노릇이나 하던 잉여였던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무사시를 배치한 C부대를 전방에 내세우고[* 지휘관은 [[레이테 만 해전]] 당시 구리다 턴으로 유명한 구리다 다케오 중장], 약 190KM 후방에 정규 항공모함인 [[다이호(항공모함)|다이호]], [[쇼카쿠]],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핵심전력인 A부대[* 지휘관은 오자와 중장 본인]와 개조항모 [[히요]], [[준요]], 그리고 경항공모함 [[류호]]로 이루어진 B부대[* 지휘관은 조지마 다카지 소장]를 통합 운용했다. 이 배치를 한 이유는 전방 C부대의 전함과 순양함의 정찰기 세력을 적극 활용하여 미군을 먼저 찾는 한편, 미군이 공격해올 경우 C부대를 통해 미군의 공격력을 흡수하여 주력을 보호하기 위함이였다.[* 같은 항공모함끼리의 대규모 전투이며 필리핀 해 해전 이전에 벌어졌던 [[미드웨이 해전]]의 경우 이런 몸빵 전력을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제대로 배속해주지 않아서 항공모함이 선두에 나서버렸고 장갑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항공모함이 미국 함재기들 공격력을 흡수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결국 전함이나 순양함이 해야할 몸빵 노릇을 대신하던 항공모함 4척은 모두 격침돼버렸다. 오자와의 배치는 이러한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만약 미군이 실제로 공격에 나설 경우 십중팔구 전방부대와 교전이 발생할 것이고 C부대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후방의 주력부대는 안전한 상태에서 58기동부대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며 설령 미군이 후방의 주력함대를 알아채고 공격대를 보내더라도 전방부대의 요격망을 뚫고 공격해야 하는 위험을 부담해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마주칠 전방부대의 요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거기에 괌에 있는 지상발진 항공대 또한 여유있게 미군 함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진형은 안 그래도 부족한 구축함들을 분산시키는 꼴이어서 대잠에 취약했고 이는 나중에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공세에 나설 때는 복수로 분산(했다고 생각)한 미군의 양동작전에 대비해, B부대의 함재기를 예비로 두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공격에 투입하기로 했다. 다만 이 때 자신의 함재기를 4파로 분리해 제파식으로 출격하게 했는데, 제파공격 자체는 한번에 지나치게 많은 공격기들이 달려나가 몇몇 표적만을 지나치게 집중공격하는 걸 막기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숫적 열세와 조종사들의 기량 문제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한가지 참고할 것은 본 해전에서 오자와는 함대를 3개 부대로 갈랐지만 실질적으로는 통합하여 운용하였다. 오자와는 휘하 부대가 독단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으며 3개 부대가 사실상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이는 상대방인 미 해군의 스프루언스 제독이 본 해전에서 오자와를 상대했던 방법과도 같으며, 또한 이때까지 연합함대가 구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 해군은 부대를 세분화하고 여러 방향에서 적을 공격하는 전법을 사용했다. 앞서 미군에 노획된 작전 문서에 담긴 방어 계획도 이런 식이었다. 또 하나 참고할 것은 오자와는 괌을 비롯한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를 자신들 함재기들의 작전 거점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미함대를 공격한 뒤에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에 착륙하여 연료와 무장을 보급받고 다시 미 함대를 공격한 뒤에 항모로 복귀하는 이른바 왕복폭격을 구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자와 휘하의 부대장 중 하나가 미 함대 발견 직후 이 생각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오자와는 이러한 부하의 시도를 막았다. 오자와는 왕복폭격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으며, 공격에 나선 함재기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나 지상기지로 향하는 정도만 허락했다. 오자와는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는 가쿠다 중장의 제1항공함대의 작전기지로 인식하였으며, 함재기로 공격에 나설 때 제1항공함대와 협력하에 함재기와 지상기지의 항공기들이 미 함대를 협공하는 걸 우선시하였다. 오자와가 선공에 나선 것은 초기 항모전의 상식인 '선빵이 최고다.'라는 사상이 한몫한 걸로 보인다. 오자와 역시 파일럿들의 기량문제를 완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선공을 걸면 미군이 방어측이 되므로 기량차이는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해전에 돌입하기 전 색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자와 기동부대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공격대를 띄운 시점에서 미군은 아직 오자와 기동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먼저 보고 먼저 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 게다가 앞서 언급되었듯이 미군의 실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한 채 숫적으로 그리 꿇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도 선제 공격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그래서 전투 초반에 오자와 기동부대의 참모진들은 꽤나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이 일본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스프루언스 대장이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군이 양동으로 수송함대를 공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륙함대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에 공격적인 미처 제독을 통제하기 위해서 직접 지휘한다는 것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